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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달력을 믿고 살기가 조금 어려워졌습니다.
9월이 오면 달력은 아주 자신 있게 말합니다.
가을입니다.
날씨가 달력의 의견을 참고하지 않을 뿐입니다.
뭐, 날씨 마음이겠지요.
추석인데 마음보다 계산기가 먼저 나옵니다
추석이 다가옵니다.
결제금액을 봅니다.
마음과 장바구니가 긴급회의에 들어갑니다.
“그래도 명절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익숙한 말입니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말하는 ‘이 정도’는 누가 정했을까요.
이상합니다.
자동 업데이트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결국 방법을 찾습니다.
미리 사고, 비교하고, 할인받고,
조금 작은 걸 고르고,
받는 사람이 진짜 쓸 만한 걸 찾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키고 싶은 건 명절이지,
꼭 예전과 똑같은 ‘명절의 모양’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물론 조상님께서 올해 사과 시세표를 들고 오셔서,
“작년보다 구성이 약하구나.”
하실 가능성은 낮습니다.
아마도요.
요즘 장바구니는 면접도 봅니다
평소 소비도 비슷합니다.
잠깐.
냉장고에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상품에게 묻게 됩니다.
“굳이 너여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요즘 장바구니는 거의 채용시장입니다.
……
불합격입니다.
비교하고, 기다리고, 줄이고,
바꾸고, 다른 것으로 대신합니다.
소비가 사라진 게 아니라 눈치가 빨라진 겁니다.
배달앱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28,700원.
……
앱을 닫습니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엽니다.
저 뒤에는 언제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 소스도 하나 있습니다.
갑자기 식재료가 풍성합니다.
여름이 여름을 너무 열심히 합니다
여름휴가는 여름에 갑니다.
맞는 말입니다.
문제는 요즘 여름입니다.
여름이 여름을 너무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바꿉니다.
결국 달력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협상 완료.
다만 조금 묘해졌습니다.
여름을 즐기기 위해 여름을 피합니다.
32℃가 선선해지는 마법
사람은 적응도 참 잘합니다.
35℃가 처음 나오면 놀랍니다.
“와, 오늘 미쳤다.”
다음 날 또 35℃입니다.
“오늘도 덥네.”
밖에 나가서 말합니다.
“오늘은 좀 괜찮은데?”
잠깐.
32℃입니다.
언제부터 32℃가 괜찮았습니까.
인간의 적응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문제 해결 방식이 조금 독특합니다.
웃기긴 한데 여기서 살짝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는 불편한 일이 반복되면
불편함 자체를 줄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불편함을 판단하는 기준부터 슬쩍 옮겨버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올해가 좀 이상하네.”
다음 해에도 이상합니다.
“요즘 좀 이상하네.”
또 반복됩니다.
“원래는 안 이랬는데.”
그런데 이쯤 되면 한번 물어볼 만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원래’를 기다릴까요.
세상이 계속 비정상인 걸까요.
낭만에도 회계팀이 생겼습니다
여행을 준비합니다.
“어디 갈까?”
여전히 설레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뒤에 질문이 몇 개 더 붙습니다.
사람들이 낭만을 잃어버린 건 아닙니다.
여전히 떠나고 싶고,
좋은 것도 보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습니다.
낭만에게 회계팀이 생겼습니다.
회계팀도 여행 자체에는 찬성합니다.
“좋습니다. 가시죠.”
오.
그런데 서류를 한 장 더 내밉니다.
“단, 예산 범위 내에서.”
낭만도 이제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입과 손이 서로 다른 시대에 삽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세상이 팍팍해졌다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조금 더 보면
묘하게 재미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입으로는 여전히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동안 손은 바쁩니다.
입은 옛날 공식을 외우는데,
손은 이미 새 공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꽤 많이 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변한 게 아니라 세상이 이상해진 거야.”
뭐.
양쪽 다 조금씩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이 난이도를 올리자 사람들이 공략집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의 모습을
꼭 ‘포기’라고만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세상이 생활의 난이도를 조금 올렸습니다.
사람들은 거기 앉아서 울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계산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방식대로 공략집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쿠폰 하나 때문에 앱 세 개를 돌아다니고,
28,700원을 아끼겠다며 냉장고 앞에서 10분을 서 있고,
35℃를 피해 휴가 날짜를 옮기고,
추석 선물 하나를 사면서 가격비교창을 열 개쯤 띄웁니다.
우아하진 않습니다.
꽤 바쁩니다.
그래도 결국 자기 형편에 맞는 답 하나쯤은 찾아냅니다.
생각해보면 생활의 지혜라는 게 별건가 싶습니다.
추석이라고 반드시 비싼 선물을 고르지 않고,
여름휴가라고 가장 더운 날에 꼭 떠나지 않고,
9월이라고 긴팔부터 꺼내지 않는 것.
달력은 내년에도 9월이 오면 자신 있게 말할 겁니다.
“가을입니다.”
그때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줍시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봅시다.
덥습니까?
반팔 입으시오.
비쌉니까?
다른 것도 한번 보시오.
예전과 다릅니까?
뭐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전 사람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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